이경수라는 이름 뒤에는 늘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이경수. 그의 기량을 두고 이견을 내놓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비운’이라는 단어 속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레전드이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했던가. 대전 중앙고 재학시절, 대학생과 실업 선배들이 즐비한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당시 제8회 아시아청소년 선수권대회를 포함하여 이경수가 출전 하는 대회라면 관련된 기사는 쏟아져 나왔다. ‘초고교급 스타’, ‘고교 최대어’등으로 불리며 성인 무대로의 화려한 진출을 알렸다.
모든 대학이 탐냈던 이경수의 선택은 의외였다. 당시 동문인 신춘삼 감독을 따라 홍익대에 입학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체육과가 없다는 이유로 한양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한양대의 이경수 영입은 완벽한 스쿼드에 화룡점정이었다. 컴퓨터 세터 최태웅, 배구도사 석진욱 등 최고의 선배들과 전설을 써 나갔다. 특히, 슈퍼리그 대학부 1차, 2차, 3차 연맹전, 전국체전 등 무패 전관왕에 오르며 64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출처 : 한양대학교
‘탄력과 파워가 뛰어남에도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라는 특징은 언론이나 스카우터들이 이경수를 주목하는 이유였다. 다른 선수들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유성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구공을 만진 그는 확실한 장점이 있었다. 공격, 리시브, 디그, 블로킹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레프트뿐만 아니라 센터로도 기용되며 올 라운드 플레이어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센터로 기용되었음에도 백어택을 시전하며 거포본색을 드러냈다.
소위 ‘이경수 파동’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새롭게 도입되는 드래프트 제도를 거스르고 자유계약으로 KB손해보험의 전신인 LG화재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 타 팀과 법정 소송과 은퇴 발언을 불사하며 우여 곡절 끝에 그는 LG화재 선수로 경기에 뛰게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의 프로 입성기 만큼이나 성인 무대에서도 존재감도 빛났다. 데뷔하던 2004년 프로배구 신인상, 그 후 2006년 한국수력원자력 V리그 남자부 최우수선수, 프로배구 KT&G V리그 득점상, 공격상, 서브상, 2007년 프로배구 올스타전 MVP, 2011년 제 7회 NH농협 2010-2011 V리그 득점 3,000점 기록상 등 엄청난 기록을 남기며 프로배구의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대표팀에서도 이경수는 중심이었다. 2001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2002년 부산아시안 게임,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최초로 연속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배구사에 한 획을 긋는다. 2011년 국가대표팀 은퇴선언을 하기 전 까지 12년간 아시아 최고의 거포로 맹위를 떨쳤다.
아무래도 천재라는 말 앞에 ‘비운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프로 선수로서 리그 우승을 해본 적이 없거니와 잦은 부상 때문이 아닐까 한다. 프로 입성 전 우승을 밥 먹듯 하고 대표팀에서도 금메달을 숱하게 목에 걸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프로 배구 팬들의 기대는 누구보다 높았을 것이다. 많은 나이에서 비롯된 체력적인 한계와 에이스로 활약해오며 많은 공을 때려야 했던 숙명은 잦은 부상으로 나타나 더욱 찬란히 빛날 수 있던 그의 커리어의 발목을 잡았다.
출처 : 발리볼코리아
그토록 그가 소망했던 정규리그 우승과 MVP는 그의 프로필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력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경수를 떠올리면 “최고의 선수였다.”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프로 선수가 은퇴를 결정하며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아픔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이경수는 ‘비운의 천재’가 아니다. 배구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영원한 레전드’이다.
글: KB스타즈 배구단 챌린져 이원주
사진 : KB 손해보험 배구단, 한양대학교, 발리볼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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